저는 전통적 유교와 불교가 혼합된 가정의 7남매 중 고명딸로 태어나 큰 오빠의 손에 이끌려 동막장로교회 교회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교회는 멀어져 갔고 대학에서는 불교 서클에 가입하여 불경에도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남편 직장 때문에 수원으로 이사한 후 보험 아주머니에게 이끌려 수원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 두 번째 신앙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때를 따라 도우시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평탄한 생활을 하였는데, 남편이 사출금형 공장을 시작하고 16년쯤 IMF가 와서 주위의 거래처가 도산되는 관계로 우리도 많은 빚을 안고 문을 닫았고, 즐거웠던 신앙생활도 어느덧 부끄러움과 자존감의 상실, 좌절 속에서 교회바닥에 엎드려 울 수 밖는 눈물의 신앙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남편이 거적을 쓰고 서울역에서 노숙자가 안 된 것을요. 주님께서 삼상 2:8절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과 함께 앉게 하시며”, 렘 29:11-13절 “너희가 온맘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라는 말씀으로 제게 소망을 심어주셨고 힘들고 지쳐서 울 때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신댔지. 나를 만나 주신다 했지”하며 다시 굽힌 무릎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모든 것이 회복되고 있던 2000년, 남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2년뒤엔 조영제 부작용으로 신장이 망가져 말기 신부전으로 투석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엔 언제나 자신을 가졌던 남편의 건강상태가 나빠지자 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귀족과 함께 앉게 하신다면서요....” 이번일은 IMF때 공장 세 개가 문을 닫은 상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실감이 컸습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주님 제가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말씀해 달라고 , 왜 이런 상황이 왔는지, 어찌 해야 되는지 알려 달라고...”
그렇게 10년을 투석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고 작은 공장이지만 그동안 쌓아온 신뢰로 주문도 쇄도 했지만 일을 감당할수 없어, 남편을 설득하여 사업장을 정리하고 정기 검진하기 위해 병원에 들어갔는데 폐암 3기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또 한반의 절망이었지만 내색 할 수 없어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항암치료를 반복하길 8개월, 그러나 그는 나를 두고 하늘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이로 인해 머리는 크고 가슴은 아무런 감동도 없으며 터널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상실의 아픔과 슬픔의 연속된 날들을 보내며 울고만 있었습니다.
올 해 들어 시작된 담임목사님과의 성경공부, 별 기대는 없었지만 얼음 같이 차가워진 나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헐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반, 의심반, 또 권사라는 의무감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 이야기’, ‘예수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며 사망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는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말씀’,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이것이 사실로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따뜻한 방에 앉아 이 글을 쓰며 생각합니다. 아무 공로 없는 내가 이런 복을 누려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거름더미에서 건져 귀족과 함께 하시겠다는”), “네가 온 맘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만나리라”는 말씀을 이젠 깨달았습니다. 거름더미에서 건져 귀족과 함께 앉게 하신다는 것이 물질의 복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 아닌 것을 알게 하신 주님, 그리고 만나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지켜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엄상숙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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